프랑스 절대 왕정의 흔적,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여행지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베르사유 궁전입니다. 이 궁전을 비유하는 수식어는 굉장히 많은데요, '프랑스 절대 왕권의 상징', '유럽 왕궁의 원조', '바로크 양식의 결정체' 등 이 궁전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몇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 이 궁전을 짓게 한 바로 그 인물,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군주인 루이 14세입니다.
그렇다면 루이 14세는 왜 새로운 궁전이 필요했을까요?
6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목숨의 위협까지 받으며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상황을 겪은 후 기필코 왕권을 강화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가 채 성인이 되기도 전에 귀족들의 반란(프롱드의 난)이 발생하면서 루이 14세는 반란의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 귀족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견제하며 관리할 필요성을 통감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재무 장관의 성에 초대되어 연회에 대접을 받던 루이 14세는 극도의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당대 최고의 미술가와 문사들이 모여 그들의 사회가 형성되면서 왕인 자신을 압도하는 그들의 권력을 보면서 일종의 치욕감을 느끼게 되죠. 재무 장관이라는 자가 국고를 탕진하며 그렇게 훌륭한 성을 짓고 예술품에 둘러 싸여 연회를 베푸는데, 국왕인 자신은 낡아 빠진 고성에서 너덜거리는 침구에 잠을 자며 재무 장관의 호의에 얹혀 지내야만 했습니다.
루이 14세는 전 유럽을 압도할만한 새로운 궁전이 필요했고, 그 장소로 베르사유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곳은 루이 13세의 사냥터에 딸린 초라한 성에 불과했었고 그 위치가 늪지대에 있어 궁전을 짓는데 좋은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늪지대에 궁전과 정원, 마을이 세워졌으며 이 건축의 역사는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예술가와 명장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20여 년 만에 궁전이 완성되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 대중들 앞에 화려한 볼거리를 선보이는 일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궁전에서 불과 십여 년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복잡하고 세밀한 에티켓, 세련된 궁정 예법이 도입되었습니다. 만찬의 진행 순서, 좌석 배치와 각자 입을 옷, 취할 행동 등이 하나하나 지정되었을 뿐 아니라 왕의 옷을 입히는 일과 세수를 시키는 일, 코를 풀게 하는 일 등도 다 격식대로 행해졌고, 그 담당도 제각기 따로 있었습니다. 이렇듯 베르사유에서 왕의 일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연극과 같았습니다.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문화인 에티켓 문화와 궁정 예절이라는 것을 도입하면서 루이 14세는 본격적으로 프랑스 역사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되죠.
이후 이 궁전에서의 사치와 향락으로 결국 프랑스혁명을 불러일으켰고, 루이 16세와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가 콩코드 광장에서 처형됨으로써 태양왕 루이 14세가 정점을 찍었던 부르봉 왕조는 무너지게 됩니다. 프랑스혁명은 세계사로 볼 때, 아주 큰 의의를 가지는데, 이 혁명을 통해 전제 군주가 중심이 되는 절대 왕정이 타도하고 시민 계급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평범한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근대 사회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착된 종교적 이념을 배제하고 종교적이고 구습에 젖은 낡은 사고방식에 대한 계몽사상의 전면적인 승리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자유주의 이념이 제창되게 됩니다.
머지않아 근대사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건,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도 글을 하나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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